《방화주의 리얼리즘 Pyro-Politics Realisim》
2025. 9. 6. ~ 2025. 9. 20 (일, 월 휴관)
13:00~19:00

HH(서울 구로구 신도림로15가길 19 / 19, Sindorim-ro 15-ga-gil, Guro-gu, Seoul)

안상범, 이지훈, 윤장호, 장영해, 최인영, 프리즌 브레이커

큐레이터: 윤태균
공간 디자인: 김예솔
포스터 디자인: 남지윤
설치: 김예솔, 김영호
사진: 윤태균
후원: 서울문화재단

*웹 리플랫 (모든  글과 이미지의 저작권은 각 작가에게 있음)

파시즘의 귀환과 신반동주의는 언제나 어떤 미래가 이미 도착했다는 선언으로 시작된다. 시간은 더 이상 중립적 배경이 아니다. 알고리즘으로 가속된 지구적 생산·소비 사슬 속에서 권력은 흐름을 선점해 미래-가격을 고정한다. 방화주의(Pyro-politics)는 이 선점된 시간을 태워 버리는 전략이다. 화염은 과열된 현재를 불완전 연소 상태로 되돌려 새로운 사건이 삽입될 간극을 만든다. 이때 정치적 주체는 흩어진 잔불 속에서 태어나는 불안정한 시간을 조직하며 정치적 상상력을 공간이 아닌 시계열 안에서 되찾는다. 방화는 파괴가 아니라 타버린 잔해가 재편성될 여백을 확보하는 초학제적 조경술이다. 

세계가 끝났다는 비관은 오히려 새로운 인식의 파이프라인을 여는 승인 절차이다. 불안은 주체를 해체하기보다는 서로 다른 규모, 예컨대 세포, 도시, 행성 등을 가로지르는 공명이 된다. 고딕적 페시미즘은 종말이 아니라 강도를 재분배하는 미시 정치이다. 역사는 직선이 아니며 미래 또한 펼쳐진 모서리를 그대로 유지하지 않는다. 과거는 종종 접혀 현재의 뒤쪽에 들러붙고 미래는 종이비행기처럼 구겨져 눈앞으로 내던져진다. 이 접힘과 구김은 기억, 예측, 시뮬레이션이 뒤엉킨 비선형 인지 지도의 실재적 작동 방식이다. 그러므로 정치는 접힘과 구김의 (무)질서를 편집하는 작업이다.

방화주의는 정부나 제도를 지운다는 급진적 저항이라기보다 오히려 지나치게 매끄러워진 관리 알고리즘의 표면에 조그만 그을음을 남겨, 프로세스에 뒤틀림을 야기한다. 초정상화(supernormalize)! 불씨는 예측 모델의 시계열을 흐트러뜨리고 인간-기계 협력 고리를 한시적 오작동으로 밀어 넣는다. 그 짧은 오류 구간에서 새로운 정치적 행위 주체가 출현할 여지가 생긴다. 방화주의는 의도된 버그 작성술이다. 완전히 불태우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 연소를 관리하며 시간의 누락분을 점유한다. 소비되는 미래를 지연시키기. 그 공백 속에서 아직 이름 없는 사건을 가동하기.

이 현장은 미술이라는 고립된 해석에 갇히지 않고 전시장 바깥의 모든 것과 함께 연속적으로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의 방화는 더 큰 전지구적 화재라는 연속체의 일부이다. 따라서 각 작업들은 완결된 내용을 가진 변증법적 체계가 아니다. 유기체와 무기체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세계의 국지적 진술에 불과하다. 이론과 예술은 더 이상 단선적 논증의 형식이 아니다. 여기서는 정통적 논증과 반박의 절차가 의미를 잃고, 용융된 담론들이 흐르면서 서로의 벽을 침식한다.

그들은 이제 자본주의가 변증법적 역사를 따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제 고어와 포르노, 마약과 제약, 테크놀로지와 신체 매매가 주변의 물질들을 태워버리고 이 타버린 재들은 예상되지 못한 다음의 일들을 위한 재료로 쓰인다고 말했다.

방화는 항상 범죄이다. 방화는 파국 그 자체를 위한 것이다. 화재 직후 찾아오는 절멸과 예외 상태는 집터를 태워버림과 동시에 화재라는 거대한 사건을 역사에 박아넣는다. 그러나 방화는 정체된 미래를 열어젖힌다. 누구도 화재가 난 이후 이곳에 무엇이 다시 세워질지 모른다. 방화는 어떤 목적을 위해 미래를 열어젖히는 행위가 아니다. 정형화된 물질들의 흐름을 흩트려 놓고, 언어적 재배치를 가능케 하는 비의도적 역사화이다. 수행되는 것은 오로지 불타는 현장이며 잔여하는 것은 폐허가 된 공터이다. 화재는 철제 빔(beam)과 기둥을 제외한 모든 벽과 가구를 불태운다. 남겨진 것은 새로운 건물의 구획을 위한 폐허의 토대이다. 폐허는 파괴의 흔적이나 종말의 징조가 아니다.

자본주의의 양태들-금융과 미술시장, 탈역사화된 미술관, 과학과 테크놀로지, 그리고 세계화. 방화광들은 이것들을 빌려 다음 단계로 달아난다. 방화범은 이것들을 방화의 땔감으로 사용한다. 기계들은 녹아내린다. 플라스틱과 목재, 볼트와 나사, 기어와 모터는 한 데 녹아 눌어붙는다. 녹아내린 재료들은 변증법적 유기체로서 스스로를 새로운 기계 장치로 재구조화한다. 녹아내린 자본주의의 기계들은 미리 정해지지 않은 다음 사용자에 의해 재 목적화된다. 죽음 충동과 리비도의 무절제적 흐름이 야기하는 불쾌함이 위반으로서 가치를 가진다. 세계화- 기후 위기와 1세계의 긴축 정책, 전쟁과 죽음들. 모든 사물은 자본주의적 재영토화로 치닫는다. 그러나 이 현실을 자연 상태라 주장하는 몇몇 신자유주의자들은 불평등과 우생학을 체제 단위로 확장한다. 작금의 문제는 가부장적 백인우월주의자 주체성이 편집증 환자 개체에서 집단적 수행의 실체로 부상한다는 점이다. 진보주의자들은 공황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패배자로 인정한다. 스스로 진보적이라 여기는 미술계에도 이러한 공황적 환각은 잔존한다. 미술 제도 자체가 미술을 갉아먹고 끝내는 절멸에 이르게 할 것이란 사실을, 우리는 예술의 민주주의라는 신화에 사로잡혀 망각한다. 각종 비엔날레와 아트페어를 보라. 마크 피셔(Mark Fisher)의 말처럼, 우리가 이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윤리적 입장을 그 내부에서 국지적으로 피력하는 작업을 미술관에서 소비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닥친 위기들을 따끔하게 꼬집는 작업을 견고한 미술관 벽 안의 에어컨 바람 속에서 감상하며 윤리적 해방감을 만끽한다. 아방가르드는 정신분열증 환자로 병원에 갇혀있고, 스스로를 아방가르드라 주장하는 미술계는 아방가르드의 일기장을 얼기설기 엮은 브리콜라주이다.

방화는 아방가르드도, 행동주의도 아닌 저지름과 관조의 단계이다. 죽음충동과 쾌락. 카텍시스의 방향은 충동이지만 그 벡터는 파괴 이후로 향한다.

방화주의의 효과는 비의도적 클리나멘(clinamen)을 만들어 내는 데에 있다. 테러, 화재, 사고의 현장은 클리나멘으로 주변의 원자들을 사건의 축으로 삼는다. 미결정적 입자들은 사건을 중심으로 재결정화된다.

오늘날 (자본주의라는) 신적인 현실 너머로 세계를 밀어붙이기 위해서는 반프로메테우스주의적 고루한 편견들을 버리는 편이 나을 것이다. 좌파에게는 단언된 묵시론적 미래를 파괴하는 것이 상실된 미래를 복구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는 방화가 아니며, 방화 이후의 재건이다.

반동주의적 프로메테우스주의는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X 프로젝트에 의존한다-자본주의의 무한한 속도 강화로 인한 기술적 특이점. 영화 <엘리시움>에 등장하는, 황폐해진 지구와 우주로 떠난 계층의 신체 강화는 우파적 프로메테우스주의의 미래 스펙터클이다. 인간 신체의 강화와 불멸은 세계를 도구적 이성의 희생에 던져넣는다. 우리는 거꾸로 비인간을 인간으로 계층화해야 한다. 반면 마르크스주의의 재독해로서 좌파 정치의 프로메테우스주의는 미래를 파괴함과 동시에 무작위적 탈영토화로 밀어 넣는다. 이것이 유일한 미래의 북구 방법이다. 슈왈제네거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터미네이터 2>의 저항군은 T-300 대신 T-1000을 강탈했어야 한다. 끔찍한 미래는 오늘 아침 눈을 뜰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범인은 누구인가? 범인의 색출은 역사학자에게 맡겨져야 한다. 범인이 누구인지와 상관 없이, 결국 폐허 위에는 새로운 구조가 세워진다. 주인 없는 폐허에는 콘크리트가 뒤덮일 것인가 새로운 씨앗이 심어질 것인가?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기억과 예견, 애도와 나아감 사이의 합리적 방황은 현재의 폐허를 비선형적 시공간으로 이끈다.

로버트 스미스슨이 말한 “예술의 우주적 주소”는 작품이 더 이상 인간 관객에 봉사하지 않는 좌표계를 상정한다. 울트라-헤븐 은 인간·기계·입자의 다층적 궤도를 서로 엮어 풀어내는 가변적 플랫폼이다. 이 연속체에서 ‘절단(cut)’은 단절이 아니라 스케일 이행의 관문이다. 예술은 개념을 외부로 방출해 데이터화된 행성적 메타볼릭 회로에 끼워 넣고, 다시 돌아온 변형 신호로 자기를 재구성한다. 관객성은 연속체의좁은목(throat)을 통과하며 생성되는 사건적 집중의 형식으로 탈바꿈한다.